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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立志傳 인물)

작성자명이**
조회수1294
등록일2016-03-17 오전 11:14:03

立志傳 인물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정치인에게 투표할 때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과거에 고생한 경험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노신영은 1930년 평남 강서출신이다. 평양에서 몇째 안가는 부잣집 아들로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남북분단의 비극을 겪자 단신으로 월남했다. 일가친척 하나 없이 서울거리를 떠돌며 노숙을 거듭하던 그는 가까스로 군고구마통 하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끼니를 때우고 헌책을 사보며 고교시절을 보낸다. 서울대법대에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는 날 아침. 고구마통의 불이 꺼질까 걱정이 되어 헝겊 쪼가리로 불구멍을 단단히 막고, 옆집 구멍가계 아저씨에게 “잘 좀 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장춘단 공원을 떠나 동숭동 서울대로 달음박질해 갔다. 서울법대에 합격했다. 그는 통역장교로 군에 근무하면서 외무고시를 준비,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외무부 아주국장 기획실장 駐로스엔젤레스-뉴델리 총영사, 인도, 제네바대사를 거처 1980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됐다. 그리고 5년 뒤인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1970년 12월 7일 독일인 최초로 폴란드를 방문하여 비 내리는 날 유대인 40만 명 추모 기념비 앞에 무릎 꿇은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 위대한 정치가다. 그는 독일이 범한 역사의 잘못을 고백하고 많은 물질로 보상에 앞장섰다. 동서 긴장완화에도 크게 공헌하여 197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브란트는 1913년 사생아로 태어났다 소년시절 이름은 허버트이다 허버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거칠어서 나치 당원과 거리에서 싸움하기가 일쑤였다. 게슈타포의 위험인물로 지목을 받자, 스무 살의 어린 몸으로 홀어머니를 작별하고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으로 노르웨이로 탈출한다. 노르웨이에 정착한 브란트는 노르웨이의 외상이 되어 고국에 돌아가기로 꿈꾼다.

그러나 그가 27살이 되던 1940년, 독일군은 드디어 노르웨에 상륙했다. 게슈타포는 헐버트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또다시 신변의 위험을 느낀 브란트는 노르웨이의 군대로 가장하여 스스로 포로가 됨으로써 독일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오히려 신분을 숨길 수가 있었다.

1945년 독일이 멸망하자 브란트는 육군 소령의 계급장을 달고 노르웨이 군사대표단 공보관으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48년 독일 국적을 회복하고 베를린 시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1957년 서 베를린 시장, 69년 서독 수상에 올랐다.

두 사람 모두 전쟁과 혼동 속에서도 웅지를 품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인생의 밑바닥에서 고전 분투하여 정상에 오른 위대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