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Hall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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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땅에서 태어나 한국 이름과 한국말을 쓰면서 한국인들을 위해 땀과 눈물을 아끼지 않았던 셔우드 홀.

Dr. Hall 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던 선교사들 중의 한 분이다. 그러나 그는 한 명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때부터 하나님은 그 집안을 통째 우리나라로 옮겨놓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1890년 9월에 캐나다 장로회가 파송한 의사 부부인 윌리엄 제임스 홀(W. J. Hall)과 아내 로제타 홀이 조선에 발을 딛게 된다.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아니 서양의 이러한 사역을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런 시절……. 윌리엄 제임스 홀은 청일 전쟁 후 전염병이 번졌을 때 의사의 일에 충실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조선에 온지 4년 만에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하는 조선과 아내, 어린 아들 그리고 뱃속의 태어날 딸을 남긴 채…….

딸의 출산을 위해 잠시 미국으로 돌아간 아내 로제타 홀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 사랑하기를 이어간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마저 전염병으로 하늘나라로 보내야만 했다. 에디스의 나이 4살 때였다. 그녀는 남은 아들 셔우드 홀과 함께 그녀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16년이 지나고 장성한 셔우드 홀은 미국에서 조선을 위해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선을 사랑할 또 한 명의 의사인 아내를 만나게 된다.

닥터 셔우드 홀이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황해도 '해주구세병원'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과 사고방식은 한국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닥터 셔우드 홀은 매일 수많은 결핵 환자를 진료했다. 전염력이 막강한 결핵은 당시 일제는 물론이고 한국인들도 시원한 치료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 로제타 홀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환자들을 돌보며 홀 가족의 희망이기도 했던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도 34 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 했다.

닥터 홀은 비장한 결심과 각오로 폐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소 설립을 계획하고 해주시 황해 바다가 보이는 곳에 백여 명의 결핵 환자를 수용, 치료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요양소였다.

그는 또한 요양소 운영비도 마련하고 결핵의 심각성을 계몽하기 위해 1932년 천신만고 끝에 남대문을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닥터 홀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와 같은 외국에서도 호응이 있기를 바라면서 여러 곳에 편지와 실들을 발송했다. 이를 방해하려는 일본인들은 타자로 쓴 편지는 인쇄물이니 우표를 더 붙여야 한다는 핑계로 크리스마스가 다 지난 후 발송하게 하곤 했다. 그러나 닥터 홀은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이 일들을 계속해나갔다. 한국과 한민족을 위한 닥터 홀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횡포를 부리던 일본인들은 결국 범죄자라는 누명을 씌워 닥터 홀을 추방했다.

1940년,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 땅을 떠났다. 곧바로 인도로 건너간 닥터 홀은 그곳에서 새로운 의료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은퇴 후 한국에 대한 책을 썼다. 그 책이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다.

1984 년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 출판되면서 그는 한국으로 초청받게 된다. 그전만 해도 아무도 셔우드 홀을 아는 한국 사람은 없었다. 그때 그는 91세의 나이로 은퇴하여 인생의 말년을 그의 아내와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그의 아내는 변변히 입고 갈 옷조차 없었다. 조선을 위해 아니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아무것도 모아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조선사랑은 그의 인생이었고 전부였다.

닥터 홀의 부모가 평양에 세운 병원은 발전해 '홀 기념 병원'이 되었고, 모친 로제타 홀이 설립한 '동대문 부인 병원'은 이대부속 병원으로 성장했다. 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열었으며, 그 후 창설된 그 분원은 현재의 '인천 기독병원'과 '인천 간호보건 전문대학'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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