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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로남지 3월호(건국전쟁)

작성자명이**
조회수17
등록일2024-02-29 오후 4:38:59

‘THE BIRTH OF KOREA'

(건국전쟁)

 

 

축구광인 저는 청년시절,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비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월드컵 예선은 홈&어웨이 방식으로, 일본과 우리나라가 아시아 최종 예선을 겨루게 됩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대표가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일본에서 예선전 2경기를 모두 하게하면서, 선수단에게 만약 지면 귀국하지 말고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고 합니다. 전쟁직후라 선수단도 어렵게 꾸린 한국팀은 1차전 51 , 2차전 22 무승부로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따내고, 도쿄 메이지 왕립 스타디움, 도쿄 한복판에 최초로 태극기가 게양됩니다.

저의 의문은 대학 때까지 알고 있던 이승만(1875-1965)은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이른바 친일파를 중용(?)한 친일파 청산실패의 장본인인데 그렇게 일본을 싫어했나?”

 

개봉관 2개로 2월에 개봉해 처음 6일 동안 영화관에서 영화포스터도 붙여 주지 않았던 건국전쟁이 현재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공과(功過)에 대한 가장 논란의 인물은 단연 이승만과 박정희인데, 이 영화에서는 김구를 추가시킵니다.

박정희는 그의 자녀가 대통령에 당선되므로, 어느 정도 국민들에게 공이 인정받은 면이 있습니다. 반면 이승만은 1960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금기어였습니다. 이승만의 과보다는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공에 포인트를 맞춘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이승만의 공에 대한 대중들의 인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패망에 의해 해방이 되자마자 남북으로 갈려 전쟁을 치르고 아직도 이데올로기로 남북은 물론 대한민국 내에서도 전쟁(?)중인 사실은 슬픈 현실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이승만'이 철저하게 대한민국 역사에서 비난과 왜곡의 중심이 되어야 했고 대한민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을 그의 공을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게 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건국이 미제의 앞잡이들과 친일파 세력들이 주도했고, 심지어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어 수백만명이 유튜브로 시청한 백년전쟁에서는 '플레이보이', '살인자', ‘정치깡패라는 단어까지 등장합니다.

 

건국전쟁의 감독이 3년 동안 이승만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내린 결론은 '비난과 왜곡의 화살이 집중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한 노인에 대한 미안함...' 이었다고 합니다.

 

배재학당 졸업 후 이승만은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활동을 펼치던 끝에 고종을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 정부를 세우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가 잡혀, 24세이던 1899년 종신형을 받습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저술한 그의 명저 독립정신』(1)의 결론에서,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데, 이 교[야소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오……. 마땅히 이 교로써 만사에 근원을 삼아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되어야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이 되[리라]”고 쓴 이후 평생 기독교 국가를 꿈꿉니다.

 

이승만은 1948510,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73세의 최고령 의원으로 당선된 후 임시의장에 선출되어, 등단 후 일성으로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의해, 이윤영 의원(목사)의 기도로 역사적인 개헌국회를 시작합니다. 7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어, 그가 대통령으로 12년간(1948~1960) 재임할 동안 유교와 불교의 나라였던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는 급속한 복음화를 이루어 냅니다. 하지만 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그가 정립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시위에 의해 85세에 물러납니다. 시위가 허락되지 않는 공산주의 북한에서는 지금도 건국수령 김일성에 대한 비판은 곧 죽음입니다.

건국전쟁은 이승만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엔딩 크레딧으로 많은 교회가 도움을 준 것을 표했지만,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로 충분히 이해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아쉬움이 2가지 남습니다.

먼저는 이승만의 가장 큰 공 중 하나로 꼽히는 토지개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특정 정당의 대표를 출연시켜(지금의 신드롬을 예상 못한 감독의 의도는 이해되지만) 주로 진보계열에서 많이 제작하는 프로파간다 영화의 티를 너무 노골적으로 남겨 결과적으로 관객의 스펙트럼을 좁혀 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공포로 석방’(2)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너무 간단하게 처리했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영화제목을 건국전쟁’(마치 백년전쟁에 대항하는 듯한)보다는 부제인 ‘THE BIRTH OF KOREA'를 제목으로 했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한 비판도 많고 그 근거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지금의 시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당시 독자의 시각으로 읽어야 더 깊은 이해와 감동이 있듯이, 이승만 시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식민지 설움과 가난, 교육부재, 그리고 세계대전을 2번이나 치룬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폭력과 혼돈의 시대였고,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세계 최약소국 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의 대한 평가는 어차피 선택적 결정에 의해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유사이래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 외에 과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각 나라의 건국영웅 대부분은 과보다는 공을 인정받고 국부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먼 훗날, 아니 올해라도 남측에 의해 남북통일이 된다면, 이승만에 대한 주류적 평가는 말 그대로 건국영웅일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반대상황으로 북남통일이 된다면 그의 평가는 완전히 뒤바뀔 것이고요.

 

“NO OPERATION, NO COMPLICATION”

메스를 드는 의사들을 가장 난처하게 하는 것은 수술 후 합병증입니다. 단언컨대 합병증이 100% 없는 수술은 없습니다. 만약 수술하지 않는다면 합병증으로 비난을 받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수술을 해야 환자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의사는 압니다. 수술 성공으로 느끼는 기쁨과 보람은 금방 잊히지만, 합병증이 생긴 환자의 실망과 분노는, 의사가 평생 짊어져야 할 숙명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애국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로마서 9:2)


 

(1)『독립정신1904년 특별사면으로 출옥한 이후인 1910,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됨.

(2)이승만은 전쟁에 지친 미국과 중공의 휴전협정 추진에 극력 반대하며 한국만의 북진을 주장하며, 휴전의 가장 민감한 협의 사항이었던 포로교환문제를 어렵게 만든 사건. 거제도에 수용된 17만 명의 포로들 중 약 3만명의 반공포로들을 유엔군에 통보하지 않고(심지어 유엔군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야반도주 시켜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한 사건. 미국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승만을 북진 통일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예측 불가능의 인물로 인식함. 아이젠하워는 회고록에서 "대통령 재임 8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건 그 때가 유일했다."라고 했다. 결국 당장 휴전에 급한 미국이 양보하여,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는 조건으로 대한민국 국군 20개 사단의 무장 지원,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었다. 이로서 한국은 미국의 각종 원조와 확보된 안보를 토대로 이후 경제 발전에 자금을 올인 할 수 있었다.



: 이종훈 편집장. moses2000@nate.com

(18다락방 순장, 의대를 꿈꾸는 대한민국의 천재들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