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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새로남지 7월호(차범근)

작성자명이**
조회수1906
등록일2014-07-03 오후 2:41:21

차범근


  영국 스포츠전문매체 <스포츠몰>에서 지난 5월21일 역대 한국 축구 베스트10을 선정했다. 1위 차범근 2위 박지성 .... 차범근을 해설위원으로만 알고 있는 중학생 아들에게 이 결과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조국인 우리나라에서만 차범근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데, 이것은 선수시절부터 시작된 축구협회와의 갈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002년 한일월드컵 조추첨자로 차범근이 아닌 연예인 송혜교가 선정되었을 때 세계 축구인들은 차범근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MBC에서 해설을 하던 차범근을 인터뷰하기 위해 경외감에 가득찬 눈빛으로 긴 줄을 서 있던 외국기자들을 보고 우리나라 기자들이 많이 놀랐다고 한다. 1989년에 은퇴한 차범근이 2008년 자신이 뛰었던 독일 레버쿠젠 홈경기를 관전하러 갔을 때 장내 아나운서의 차범근 소개에 전 관중이 기립하여 환호를 보내는 동영상을 본다면 그의 명성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차범근의 인생을 요약하는 3가지 단어는 축구, 가족, 신앙이다. 차범근은 1953년 경기도 화성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차범근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 명문인 경신 중학교를 거쳐 경신고에 진학한 그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해 이듬해 청소년 대표, 3학년인 1972년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 된다. 이후 그는 눈부신 활약으로 일약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공군축구팀 강화를 위해 2년 복무의 특혜를 약속받고 입대해 2년 동안의 복무를 마치고 1978년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독일 분데스리가의 SV다름슈타트98에 입단해 1경기를 뛰었는데 군대의 입장이 갑자기 바뀌어 출국 11일 만에 소환장을 받고 귀국하게 된다. 명목상 군대문제였지만 사실은 당시 축구협회는 우리나라보다 강했던 북한축구와의 일전을 대비하고 독일에서 너무 잘해서 혹시라도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때였다. 다음해 1979년 만기 제대 후 그는 다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팀에 스카우트되어 1989년 은퇴할 때까지 엄청난 기록을 세운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는데, 역대 잉글랜드 최고의 축구선수로 손꼽히는 케빈 키건이 70년대 말 자국리그보다 한수 위였던 분데스리가에서 3년간 뛴 것이 그 방증이다. 분데스리가에서 갈색폭격기란 별명과 차붐으로 통했던 그의 주요 기록을 정리해 보면 분데스리가 308게임, 98골(이 중에 페널티 킥 골은 한 골도 없었고, 당시 외국인 용병 선수 최고기록, 이 기록은 10년 뒤인 1999년 스위스의 슈테판 사퓌자에 의해 깨졌다.) 1980년 ‘키커’지 신년 표지 인물, 세계 베스트 11 선정, 독일에서 3번째 고액 연봉 (세계최고의 축구 전문지 ‘키커’지의 80년 선수등급에서 차범근이 케빈 키건 그리고 당시 독일 최고의 스타였던 루메니게보다 위에 있었다.) 85~86 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MVP(지금도 그렇지만 외국용병이 MVP과 되기는 정말 어렵다.) 86년 월드컵 출전(당시 축구협회는 예선전에 뛰지 않은 차범근을 부르지 않으려고 했고 세계 축구계는 ‘한국이 차범근을 뽑지 않을 정도면 우승후보’라고 조롱했다.) UEFA컵 우승 2회.(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에서 각각 수상함, 당시 UEFA컵은 요즘과는 달리 각국 리그 챔피언 한 팀만 참가 자격을 주는 진정한 챔피언스리그 였다.) 1999년 월드사커지 20세기 축구에 영향을 미친 100인에 선정 축구 변방국가의 선수가 세계최고리그에서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차범근은 그 시절 많은 아이들이 그랬듯이 집근처의 교회를 가끔씩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다녔기에 말씀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배운 찬송가를 즐겨 불러서 친구들에게 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76년 당시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1학년이었던 지금의 아내 오은미를 만나면서 그는 교회에서 반주를 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교회를 많이 따라 갔다고 한다. 이듬해인 1977년 그들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차범근은 국내최고의 축구선수가 되면서 교회와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77년 성탄절 즈음 차범근은 큰 이유 없이 무릎통증이 악화되어 선수생명에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로서는 수술을 하면 선수생명이 끝이라는 위기 속에 그는 아내의 소개로 한 목사님께 기도를 받고 수술 없이 기적적으로 완치를 받게 된다. 이 극적인 체험은 차범근을 독실한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월간축구 78년 2월호는 이 사실을 특집기사로 소개하고 있다. 이후 차범근은 후배 이영무 선수(이후 그는 목사가 된다.)의 도움으로 기도와 성경에 몰입하게 되었고 때로는 밥도 안 먹고 성경을 읽어 부인과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78년 초부터 여러 교회를 다니며 활발한 간증활동을 하게 되고, 로마서 14장 7,8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더 큰 꿈을 꾸게 되는데, 바로 세계최고의 리그였던 독일에서 하나님을 위해 축구를 하는 꿈이었다. 불가능하게 보였던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진다. 1980년의 일이었다. 레버쿠젠의 수비수 유르겐 겔스돌프는 그 해 UEFA컵 챔피언에 오른 프랑크푸르트의 스트라이커 차범근에게 경기 도중, 등 뒤에서 심한 태클을 가해 큰 부상을 입혔다. 겔스돌프의 파울은 너무나도 고의적이어서 TV를 통해 그 장면을 목격한 독일 축구팬들은 경악했고 형사고발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제2요추 골횡 돌기부 골절」이라는 진단으로 선수 생활의 사활을 걸고 치료에 전념하고 있을 때 프랑크푸르트는 매스컴을 통해 이와 같은 내용의 문서를 발표했다.「차범근은 [증오가 아닌 용서] 라고 하는 기독교적 신념에 입각해 겔스돌프에 대한 형사 고발을 거부합니다.」라고. 한번은 차범근이 상대편 선수에게 태클을 걸었는데, 상대편 선수가 ‘차, 성경을 봐라. 어디에 사람을 차라고 되어 있냐?’ 라는 말을 듣고는 이후 파울이나 보복성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분데스리가 10시즌동안 단 한 번의 옐로카드만 받았을 뿐이다. 차범근은 빠른 발로 페널티 지역을 잘 파고들었는데. 이때 반칙을 유도해 페널티킥을 얻는 플레이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런 행동은 기독교 신자로서 자세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차범근은 플레이 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동료들과 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아시아인인 차범근은 후에 브라질에서 독일로 건너 온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전파한 기독교 운동의 선구적 역할도 했다. 요코하마에서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을 꺾고 우승한 브라질 선수들 중 'JESUS ♥ YOU'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그라운드를 뛰어 다니는 몇몇 선수가(카카, 루치오 등) 전 세계에 중계 되었다. 이들이 바로 당시 차범근에게 영향을 받은 브라질의 죠르지뇨, 파울로 세르지오, 호베르토 루치오 등의 계보를 잇는 선수들이다. 그는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철저한 자기관리로 공격수로는 많은 나이인 37세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다. 은퇴 후, 약속대로 독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조국으로 돌아온 그였지만 그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국가대표 감독으로 참가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기간 중에 전격 경질된 사실이다. 사실 예선전에서의 호성적 때문에 국민적 기대가 높아졌을 뿐이지 그 때의 조 편성은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기에는 벅찬 조 편성(네덜란드, 멕시코, 벨기에와 한 조)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선수시절부터 생겼던 축구 협회와의 불협화음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차범근 유소년 축구교실을 계속했고, 이는 그 이전까지 없었던 유소년 인재 발굴과 육성이라는 시스템의 기초를 제공하게 된다. 경질이후 중국 프로팀의 감독을 맡으며 철저하게 한국 언론의 접촉을 피했던 그는 2001년 MBC 축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다시 고국으로 복귀하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은 극심한 반대 속에 당시 대학생인 차범근의 아들 차두리를 아마추어 신분으로는 유일하게 대표로 선발하게 되고, 차두리가 본선에서 맹활약하면서 차범근 부자는 온 국민의 사랑을 회복하게 된다. 월드컵 이후 차두리는 꿈에 그리던 아버지가 뛰었던 분데스리가로 스카우트된다. 차두리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우리나라가 최초로 원정 16강에 진출할 때 주전 수비수로 출전해 아버지보다 월드컵에서는 더 많은 활약을 하게 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차범근은 그가 이미 공언한 대로 그의 마지막 월드컵 중계를 아들 차두리와 함께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선수로 월드컵에 출전한 경우도 세계적으로 드물지만 함께 월드컵 중계를 한 경우는 세계 최초가 아닌가 한다. 차두리가 독일에서 뛰었을 때 독일기자와의 한 인터뷰에서 ‘나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 수요일과 주일에는 교회에 가고 하나님이 나를 강하게 하고 나를 안심시킨다.’라는 신앙고백을 한 적이 있다. 두리 엄마 오은미씨는 차두리가 2002년 월드컵 대표로 뽑혔을 때 ‘두리, 네가 무엇을 해내던 나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나는 스스로 설수 있는 바람직한 청년으로 자라주길 바랄뿐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차범근의 글은 따뜻하다. 많은 이들은 그가 쓴 글을 아내가 마무리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는 평생을 차범근 곁에서 최고의 조력자 역할을 했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차범근은 애처가를 넘어 공처가로 유명하다. 오은미씨는 당시 관행이었던 기자들에게 주는 뒷돈을 주지 않아서 차범근과 그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가 유독 많았다고 한다. 차범근은 선수일 때나 감독일 때나 항상 기도를 했다. 그가 국가대표 감독이었을 때 경기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문제 삼은 도올 김용옥과 논쟁을 벌인 적도 있었다. 차범근은 언제나처럼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미하엘 발락 : 여기가 차붐의 조국입니까? 너무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2002년 월드컵 독일팀 주장으로 입국 당시)(이 선수의 골로 우리나라는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올리버 칸 : 당신에게 사인 받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정말 큰 영광입니다. (2002 월드컵 야신상 수상자)  마이클 오웬 : 나는 차붐 선수를 존경한다. 난 어릴 때부터 차붐을 보고 자라났다. 나도 그 선수처럼 되고 싶다.(전 잉글랜드 국가대표. 2001년 유럽 올해의 선수 즉 발롱도르 수상자.)  루이스 피구 : 차붐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웅이다.(2000년 발롱도르 수상자)  위르겐 클린스만 : 내 자신은 어느 정도 성공한 공격수로 평가받지만 차붐 정도는 아니다. (전설적 독일 스트라이크, 현 미국대표팀 감독)  로타어 마테우스 : 난 아직 어리다 그러나 차범근은 세계최고의 공격수이다. 그리고 나의 자만을 깨우쳐 주었다.(UEFA컵 결승전 2차전 후)(1990년 발롱도르상 수상자) 알렉스 퍼거슨 : 우리가 풀지 못했던 주요한 문제는 차붐이었다. 차붐을 막을 수 없었다. 해결 불가능한 존재였다.(79년 에버딘 감독 당시 UEFA컵 1라운드 경기 후) 베켄바우어 : 차붐을 낳은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가 독일에 있었다면 어김없이 독일 대표팀으로 넣었을 것이다.(독일 최고의 축구 전설,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안았다.) 슈뢰더 독일 총리 : 방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국의 발전과 우호증진이어야 한다. 하지만 난 차붐부터 만나고 싶다. 글: 편집장 이종훈